경기도기념물 108호 & 인천기념물 25호 지정일 : 1988년 03월 21일 소재지 : 강화읍 갑곶리, 김포시 월곶면 성동리 김포시 월곶면 성동리 263-10외 271-22번지 관리자 : 김포시(국유) |
갑곶나루는 월곶면 성동리와 강화군 갑곶리 사이를 배편으로 연결한 통행로이다. 김포쪽 나루터는 문수산 자연휴양림 아래 산성포마을 입구 해안쪽에 위치한다. 밀물때는 거의 보이지 않으나 썰물 때에는 석축로의 상면이 잘 드러난다.
‘갑곶’이라는 명칭은 이 곳이 건너편 강기슭까지 거리가 좁고 수심이 얕아 몽골군의 침입으로 고려 23대 고종 (高宗)이 강화도로 피난갈 때 갑옷을 벗어 쌓아 놓고 건널 수 있었다는데서 유래한다. 이 나루에는 아직 석축로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세종실록』 26년 윤7월 12일자 기록에, ‘전 이조판서 박신의 졸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수록되어 있다. “통진현(通津縣)의 서쪽에 갑곶(甲串) 나루가 있었는데, 오고 가는 사람들은 반드시 물속을 수십보(數十步) 걸어가야 비로소 배에 오를 수 있고, 또 배에서 내려서도 물속을 수십 보 걸어가야 언덕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므로 얼음이 얼고 눈이 내릴 때면 길 다니는 나그네들이 더욱 고통을 당하였는데, 신(信)이 재산을 의연(義捐)하고 고을 사람들을 이끌어 양쪽 언덕에 돌을 모아 길을 만들었더니, 길 다니는 사람들이 지금까지 그 공로를 힘입고 있다고 한다.”
1419년(세종1) 통진에 귀양살이를 하던 박신(朴信)이 사재를 털어 마을주민과 이 석축로를 만들었다. 공사는 14년이 걸렸고, 1432년 축조된 이래 약 500년에 걸쳐 사용되었다. 강화쪽 선착장 석축로는 강화대교 검문소 뒤편에 100m 강 안쪽에 있고, 군부대 해안 철책선 안쪽이라 접근이 어렵다.
1627년(인조5) 정묘호란 때 인조가 건넜고, 이후 1636년(인조14) 병자호란 당시에 봉림대군(鳳林大君: 1619~1695, 효종)이 외적의 침입을 막은 곳이며, 1866년(고종3)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장소이다.
이 석축로는 1900년대까지 강화도와 육지를 연결하는 유일한 통행로였으나,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에 성동리와 강화군 용정리 사이 새 나루터가 생겨 폐쇄되었고, 광복 후 옛 나루터 부근에 선박으로 자동차를 나르는 나루터가 생겨 이용되다가 1970년에 강화대교(구 대교)가 개통되면서 두 나루터 모두 폐쇄되었다. 이후 제방을 쌓아 석축로가 물에 잠겼으며, 석재는 제방이나 새 나루터 등으로 옮겨져 사용되거나 없어지기도 했다. 석축 부재는 바닷물이 높을 때는 물속에 묻히고, 물이 빠졌을 때 완만한 경사의 석축로가 보인다.
석축로 외곽은 육면체로 잘 다듬은 화강석을 축대처럼 가지런하게 쌓았고, 바닥 노면석은 네모난 자연석을 25~30cm규모로 쪼개서 불규칙하게 채워 윗면을 고르게 하였다. 김포쪽 해안에 폭 12m, 길이 40m, 전면 높이 1.2m의 대형 석재 약 35개가 확인되고 있고, 강화대교 검문소 후편 100m 강안에 석축 일부와 화강석 암반이 건조 수위 때 갯벌 위로 드러나고 있는데, 노폭이 35~50m, 길이가 35m이며 전면의 높이는 1.5m, 수면 위에 나타난 대형 석재는 15개 정도다. 석재는 화강암 및 편마암이다. 저조위 수심을 따라 축조되었다.
갑곶나루 선착장 석축로는 염하를 건너 강화와 육지를 연결하는 길목으로서 옛부터 바다와 육지 사이를 왕래하는 관문의 역할을 했던 정치, 군사, 경제 상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여 왔던 곳이다.
※ 강화대교가 1997년에 완공되고 나서 (구)강화교는 차량 통행이 금지된 채 방치되어 있다가, 2010년대에 들어서 실시한 안전성 검사에서 차량 통행은 불가능하지만, 자전거와 사람 통행은 가능한 C등급 판정을 받았다. 이에 인천시는2014년에 들어서 유지/보수를 거쳐 자전거 전용 통행로로 재개통했다.
※ 박신(1362년 공민왕11~1444년 세종 26년) 묘역 _ 경기도 김포시 하성면 가금리 산43-1 보적산 보신암 선산
평화누리길3길 한강철책길을 걷다보면 애기봉 1.4km지점 길 가에서 만날 수 있다.
자는 경부(敬夫), 호는 설봉(雪峰), 저헌(樗軒), 시호는 혜숙(惠肅)이다. 재실은 호를 사용하여 저헌재이다. 운봉박씨 통진 종중회에서 세운 송덕 기념비에 의하면 박신은 운봉박씨 4대 조이며, 마조리 산7번지에 있던 옛 재실을 이곳으로 옮겨 새로 건립했다고 한다.
박신은 고려말 포은 정몽주 선생의 문인으로 우왕1년 현량과(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규정, 예조 정랑으로 관직을 시작했으나 고려가 멸망하고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할 때 관료로서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었다. 31세에 강릉도 안렴사(관찰사), 봉상시소경, 감문위대장군을, 정종때 형조전서, 승정원 우승지, 좌승지를 역임했다. 강릉 기생 <홍장 설화>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의 메인 커리어는 태종 때가 중심이다. 사헌부대사헌, 광주목사를 거쳐 사은사로 명나라 사신으로 다녀오고 사헌부대사헌, 공조판서를 거쳐 평양부윤 겸 서북면 순문찰리사, 공조판서, 호조판서, 병조판서, 의정부찬성, 이조판서를 역임했다. 세종즉위를 승인받기 위해 명나라에 승습진문사로 다녀와서 이조판서로 재직하다가 선공감(토목 영선을 맡았던 기관)제조 때 비리에 연루되어 탄핵을 받고 통진현에 유배되었다. 운봉박씨 1대 시조 박중화의 무덤도 이 산에 있는 것으로 보아 통진이 고향인 모양이다. 세종 13년 다시 조정에 나가 원로회에 참가했다. 세종26년 향년 83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의정부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수령 500년의 학목 향나무가 '깨우침을 주는 나무'라는 명명으로 인근에 서 있다. 공신전, 녹봉으로 하성 동성산 이북 땅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둘째 아들 박종우가 태종의 부마(5녀 정혜옹주)이고, 계유정난 1등 공신이므로 훈구파로 분류될 수 있다.
'남아있는 > 문화유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정리 지석묘 (0) | 2024.07.29 |
---|---|
한재당 (0) | 2024.07.29 |
장만선생 영정 및 공신록권 (0) | 2024.07.29 |
문수사풍담대사부도및비 (0) | 2024.07.29 |
우저서원/조헌선생유허추모비 (0) | 2024.07.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