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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있는/문화유산

한재당

by 구름관찰자 2024. 7. 29.
경기도 기념물 47호
지정일시 : 1975년 9월5일
소재지 : 경기도 김포시 하성면 가금리 산76-1번지 

 

 

한재당 (寒齋堂) 은 경기도 김포시 하성면 가금리에 위치하였으며, 조선 전기의 문신 한재 이목 (1471∼1498)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한재 이목은 자는 중옹, 호는 한재,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김포시 하성면 가금리에서 출생하여, 14세에 점필재 김종직 선생 문하에서 수학하고 25세인 1495년에 증광시 문과에 장원급제 하고 영안도평사 등을 지냈다. 올곧은 품성으로 당대에 명성이 높아가던 중 1498년에 발생한 무오사화에 연루돼 불행히도 28세 나이로 짧은 생애를 마쳤다. 

 

그는 특히 차를 찬미하는 「다부(茶賦)」를 지은 것으로 유명하며, 이 속에서 ‘오심지차(吾心之茶)’를 말하여 본격적인 ‘유교적 차’의 시대를 연 인물로 평가된다.  '다부'는 그의 나이 24세때 연경 유학시절 체험한 차 생활을 토대로 차의 심오한 경지를 노래한 작품으로, 草衣(意恂·1786~1866)의 '동다송(東茶頌·1837)'보다 340년 앞섰다. 분량 면으로도 약 2배가량 많으며 특히 차를 통해 얻어지는 정신 수양과 정신적 즐거움을 강조했다. 「다부(茶賦)」 는  그의 선비정신과 차에 대한 깊은 안목을 보여주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전문 다서로서 다부 및 다선이라 추앙받고 있다. 이에 매년 6월 첫 토요일에 차를 올리는 헌다례 의식이 거행되고 있다.

 

그는 나라의 흥망은 오로지 군주의 덕성에 달렸다고 주장하며 도학정치론을 폈다. 이어 그는 마음공부를 강조하며, 사욕이 없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마음공부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그의 이러한 도학정치론과 철학은 사림파의 생각을 전형적으로 담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태학에 있을 때, 성종이 병이 있어 대비가 무녀를 시켜 벽송정에서 기도를 베풀자, 이목이 태학생들을 데리고 가서 무녀에게 곤장을 쳐서 쫓아냈다. 후에 성종이 이 사실을 알고 노하여 당시의 유생들을 기록하게 하였다. 유생들은 모두 도망하였으나, 이목 홀로 도망하지 않아서 성종의 칭찬과 술을 받았다. 그는 늘 바른말 잘 하기로 유명하였는데, 이로 인해 공주에 유배된 적도 있다. 1552년(명종 7) 이조참판, 1707년(숙종 33)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충청남도 공주의 충현서원(忠賢書院)과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의 황강서원(黃崗書院)에 제향되었다. 일찍이 공주에 귀양갔던 인연으로 공주의 인사들이 충현 서원을 세우고 제사한 것이다. 

 

사당은 남쪽을 향하고 있으며, 입구의 홍살문과 외삼문, 내삼문, 사당인 정간사를 일렬로 배치한 구조이다. 이 사당 앞길 바로 밑에 있던 구사당은 헌종14년(1848)에 처음 지어진 뒤 1974년에 고쳐 지었으며 1995년에 정자를 세웠다. 1848년에 건립된 사당은 맞배지붕 목조와가로 정면3칸, 측면2칸이며 일주문과 담장이 둘러 있었으나 신사당 건립으로 인해 구사당과 일주문은 없어지고 현재는 담장과 터만 남아있다. 1974년에 자리를 옮겨 건립한 신사당은 콘크리트로 신축한 건평 12평의 건물로 위패를 봉안하고 숙종43년(1717)과 경종2년(1722)년에 추증한 교지가 함께 보관되어 있다.  해마다 이목 선생의 기일인 음력 7월 26일에는 선생에게 차를 올리는 헌다례(獻茶禮) 의식이 거행된다. 

한재당 뒤편에는 선생의 묘와 비석이 있다. 

1995년 세워진 정자, 한재다정

 

 

신사당 정간사

 

인조 3년(1625년) 세워진 선생의 비갈은 높이 144cm, 폭 61cm, 두께 14cm 규모다.

전면에는 '증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홍문관제학 예문관제학 동지춘추관 성균관사행 진용교위 영안남도병마평사 이공 목지묘'라 표기돼 있다. 후면에는 김상헌이 지은 이목 선생의 행장과 비를 세운 날짜가 기록돼 있다.  

이목 선생 묘비 탁본

 

비갈은 사적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쇠붙이나 돌에 글자를 새겨 세우는 것을 말한다. 빗돌의 윗머리에 지붕 모양을 만들어 얹어 있는 형태를 ‘비’라 하고, 지붕이 없이 머리 부분을 둥그스름하게 만든 비석은 ‘갈’이라고 한다. 비갈의 앞면에는 묘 주인공의 이름과 관직이, 뒷면에는 주인공의 일대기와 후세의 평가가 적혀 있어 그 인물에 대한 중요한 사료로 사용되고 있다.  특히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유학을 숭상함에 따라 선조와 부모에 대한 효성의 하나로 분묘를 화려하게 축조하고 석물을 갖추고 비갈을 신분에 맞게 세우는 일이 성행했다.  비갈은 당대에 가장 명망이 있고 문장에 능한 사람으로부터 글을 받고 가장 유명한 서예가로부터 글씨를 얻어서 세우는 것이 효자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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