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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있는/문화유산

장만선생 영정 및 공신록권

by 구름관찰자 2024. 7. 29.
경기도 유형문화유산 제142호 
소재지 :  경기도박물관, 경기도 김포시 하성면 가금리 7번지
지정일 :  1991-10-19

 

 

<장만선생 영정 및 공신록권>은 장만張晩(1566년 ~1629년)이 1624년(인조2) 이괄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진무공신振武功臣 1등에 녹훈되어 옥성부원군(玉城府院君)에 봉해질 때 그려진 것이다. 

 

장만의 초상화는 공신도상인 단령본 1점과 야복을 입은 심의본 1점이 현재 전하고 있다. 장만의 종가에 전하기로는 본래 무관복 초상까지 세 점이 전해져 오다가 무관복은 일제 강점기 때 분실되었다고 한다. 두 점 모두 장만의 사당인 김포 옥성사(玉城祠)에서 보관해오다 2012년에 보존처리를 마치고 경기도박물관에 위탁하여 보관하고 있다. 

 

장만 공신도상은 1625년에 도화서 화원에 의해 그려졌는데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걸쳐 보이는 전형적인 공신화상에 속하는 작품이다. 조선 중기 인물로서 반신상이 아닌 정장관복본과 연거복본 두 본 모두 전신상으로 완전하게 현전하는 예는 장만의 초상화가 유일하다. 또한 이 단령본 초상화는 작화 시기가 분명해, 초상에 나타난 양식적 특징들은 동시대의 일반 정장관복본초상화의 제작연대를 판별하는 데 훌륭한 기준역할을 한다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장만선생 영정(관복본), 2013  © 경기도박물관

 

오사모에 푸른 단령을 입고 의자에 앉은 장만의 관복본 초상은 좌안칠분면의 전신교의좌상으로 그려졌다. 진무공신에 녹훈될 때 충훈부에서 그려준 공신도상으로 추정되며 오른쪽 상단에 ‘玉城府院君 贈諡忠定張公晩畵像’이라는 글씨는 사후 ‘충정忠定’의 시호를 받은 뒤에 써넣은 것이다.장만의 행장에는 이괄의 난 때 병든 몸을 수레에 싣고 야전에서 지내다 한쪽 눈을 잃었다고 한다. 왼쪽 눈에 안대를 댄 모습으로 그려진 이유이다. 9세 때 천연두를 앓은 병력으로 수두 자국이 두드러진 얼굴의 눈동자는 정면, 코는 측면, 입은 좌우대칭이다. 17세기 공신도상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특징이다. 흉배에는 쌍학과 모란문이 곁들여져 있고, 종1품이 매는 서대犀帶를 착용했다.

장만선생 영정(유복본), 2013  © 경기도박물관

 

유복본 초상은 당건唐巾에 심의를 입고 의자에 앉은 전신좌상이며, 한 손은 무릎 위에 놓고 다른 한 손엔 부채를 들었다. 이 초상처럼 심의深衣를 입고 지물持物을 든 모습은 유사 사례를 찾기 어려운 형식이다. 유복본은 안대를 하지 않아 괸복본 보다 앞서 그려졌을 수 있지만, 그림의 크기와 화법이 유사하여 공신도상을 그릴 때 함께 그린 것으로 추측된다. 장만은 조선중기의 문무文武를 겸비한 인물로 국방과 정권 수호에 크게 기여하였다. 관복본은 그의 충직하고 엄정한 관료적인 삶의 모습을, 유복본은 관직을 떠나 재야에 머물기를 바라는 은사隱士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장만선생 공신록권 © 문화재청

 

장만이 받은 진무공신교서振武功臣敎書는 장만을 진무공신 1등에 봉한다는 내용이며, 1625년에 내려졌다. 여기에는 모두 32명의 공신이 기록되었는데, 1등에 장만 등 3인, 2등에 이수일 등 9인, 3등에 남이웅 등 20인을 녹훈하였다.   

김포시 하성면 가금로 228번길 22 옥성사

 

 

* 낙서 장만 (張晩, 1566년 ~ 1629년) 

선조~인조 대의 문신이자 무장이다.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호고好古, 호는 낙서(洛西)이다. 이조판서를 지낸 장철견張哲堅의 증손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어릴적 부친을 따라 김포에 살며 상촌 신흥 선생과 벗이 되었다. 조강포에 이호정(梨湖亭)이란 정자를 짓고 뱃놀이를 하기도 하였다. 선생의 묘소는 이북땅 풍덕의 선산에 있다.

1589년(선조 22) 생원·진사시에 합격하고, 1591년(선조 24)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승문원·예조좌랑 등을 지냈으며, 1599년 봉산군수(鳳山郡使)가 되었다. 이때  임진왜란이 끝나고 명군이 철수하면서 횡포가 심하여 백성들의 피해가 컸던 때에 선생을 보내어 그들을 잘 다스려 무사히 철군케 한 공으로 1600년 이후 충청감사, 도승지, 호조참판, 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선생은 전후 복구와 늙고 병든 자의 군역 면제를 치계하는 등 민생 재건에 힘쓰는 한편, 국방을 위해 조총부대를 창설하고 삼수군의 교육시설을 복구하였다.  1602년에는 두 차례나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였다. 최명길(1586-1647,선조19년-인조25년, 정묘, 병자호란때 주화론자)을 사위로 맞았다. 1603년 전라감사로 나가 나대용으로 하여금 전함을 설계케 하여 임진왜란 7년 전쟁으로 거의 못 쓰게 된 전함을 재건하였으며, 수군방략을 만들어 전란에 대비하였다.
1607년에 함경도 관찰사로 나가 북방 오랑캐의 정황을 조사하고 방비할 것을 치계하였으며, 선생은 이 지역이 기후가 척박하고 여진족의 침입이 잦았으나, 여진족을 몰아내고 탐관오리들을 적발하니, 백성들이 다시 모여들어 버려진 함경도 땅이 살기 좋은 땅이 되게 함으로써 국경이 튼튼해져 임기를 두 번하고도 보내어 주질 않아 5개월을 더하고 서울로 올 수 있었다.  호조참판으로 동지의금부사를 겸하였을 때 대북(大北)파의 전횡을 비판하였다가 삭직되었으나, 곧 복직되고 승진하여 형조판서가 되었다. 1622년 병조판서로 있을 때 광해군의 정치가 문란함을 보고 대책을 건의했으나, 오히려 광해군의 분노를 사게 되자 병을 핑계로 고향 통진(通津)에 은둔하였다.
1623년 인조 반정 후 팔도 도원수(八道 都元帥)로 등용되었으며, 이듬해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각지의 관군과 의병을 일으켜 안현(鞍峴 : 인왕산) 전투에서 진압하고 이 공으로 진무공신 1등에 보국승록대부에 오르고 옥성부원군(玉城府院君)에 봉해졌다.  1627년, 병조판서로 있을 때 정묘호란이 일어났으나 적을 막지 못한 죄로 부여로 유배되었다가 전공(前功)으로 용서받고 복관되었다.  1629년 11월 15일(음력)에 문무를 겸비하고 재략이 뛰어났던 선생이 서울 서대문쪽 반석동 본가에서 64세를 일기로 죽었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김포 하성면 가금리 향사(響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저서로《낙서집(洛西集)》이 있는데, 김포문화원에서 발간한 영인본이 있다. 김포에 영조 때 왕명으로 선생의 사당(장옥성사우, 지금은 전하지 않고 근래에 그 자리에 다시 세움)이 세워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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