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저서원/조헌선생유허추모비
우저서원(牛渚書院)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호 소재지 : 경기도 김포시 중봉로25번길 87(감정동 492번지) 지정일 : 1972-05-04 |
<우저서원>은 조선 선조(1567~1608) 대의 문신이자 학자이며,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한 조헌(趙憲, 1544~1592)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한 서원이자 지방의 유학교육을 담당하기 위해 지워진 교육기관이었다. 조헌은 김포시 감정동(坎井洞) 에서 태어나 금산전투에서 왜군과 싸우다 700명의 의병들과 함께 전사했다. 고경명(高敬命), 김천일(金千鎰), 곽재우(郭再祐) 등과 함께 임진년(壬辰年) 사충신(四忠臣)으로 불린다.
인조26년(1648) 조헌이 태어난 집터에 서원이 건립되었다. 조헌은 선조 초기에 통진현감(通津縣監)으로 있으면서 유생을 훈도했기에 지방유림의 건의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후 1669년경 김포유생 이만춘(李萬春) 등이 청액소(請額疏)를 올려 사액을 청하였지만 한창 첩설(疊設-중복설립)에 따른 폐단이 논의되던 때라 실현을 보지 못하다가 숙종 1년(1675) 송준길(宋浚吉)의 청과 남인정권하에서 충절장려책의 일환으로 ‘牛渚(우저)’라고 사액(賜額, 임금이 사당, 서원 등에 이름을 지어서 새긴 현판을 내리는 일)을 받았다. 우저는 뒷산이 소가 누워 있는 형상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사액을 받으면 나라로부터 토지와 노비를 지급받는다. 순조 34년(1834) 중건 이후 고종 8년(1871)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철폐령(1868년(고종 5))에도 훼철되지 않고 남은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로 하나로서, 1973년부터 3년에 걸쳐 전면 보수가 이루어졌다.
배치는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의 구조다. 강당과 사당만으로 이루어진 조선 후기의 소규모 서원 형식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가장 안쪽의 사당은 면 3칸, 옆면 2칸의 규모로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겹처마 민도리 맞배지붕으로 개방된 퇴칸이 있고 후면에는 방화벽이 설치되어 있고, 사당 내부에는 조헌선생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고, 송시열의 문집인 《우암집(尤庵集)》을 비롯하여 《청금록(靑衿錄)》, 《원생안(院生案)》, 《계현비사적기(啓賢妃事蹟記)》 등의 문집이 소장되어 있다. 사당에는 '문열사(文烈祠)'라는 편액이 걸려있는데 이는 2014년 8월 25일 설치한 것으로 본래는 현재 외삼문에 걸려있는 우저서원 현판이 걸려있었다. 설치 행사를 하고 현령 등이 임관하면 고유제를 봉행하던 관습을 따라 선출직 취임 고유제를 올리기도 했다. 문열(文烈)이란 시호는 금산전투에서 전사한 이후 조정으로부터 이조참판, 영의정 등으로 추증되고 문묘에 배향되면서 받은 것이다.
조헌선생유허추모비(趙憲先生遺墟追慕碑)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0호 소재지 : 경기도 김포시 중봉로25번길 87(감정동 493번지) 지정일 : 1979-09-03 |
사당 앞 한단 아래 우측 비각에는 서원이 창건되기 전에 건립된 조헌선생유허추모비(趙憲先生遺墟追慕碑) (도 유형문화유산 제90호)가 있다. 사방1칸의 벽체없이 개방된 민도리 맞배집이다. 본래는 조헌선생 생가터에 세워져 있었는데 유림 신응순 등의 발원으로 광해군 9년(1617)에 건립되었고 인조 26년에 우저서원이 세워지면서 현재의 위치에 안치되었다. 이 ‘중봉 조공 유허 추모비(重峯趙公遺墟追募 碑)’ 는 조선시대 4대 문장가 중 한 사람인 이정구(李廷龜)가 비를 짓고 김현성(金玄成)이 해서체로 새겼다고 한다. 화강암 장방형 받침돌(비좌) 위에 대리석 몸돌만을 올린 형태다. 유허란 ‘오랜 세월 쓸쓸하게 남아 있는 옛터’라는 뜻으로, 조헌이 살던 옛 집터에 비를 세웠다는 말이 된다. 이 비에는 조헌의 벼슬 이력, 성장과정, 앞날을 내다보는 통찰력, 임진왜란 당시의 활약상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강당은 앞면 4칸, 옆면 2칸의 규모로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며, 2009년에 보수하였다. 중앙의 4칸 대청 좌우에 2칸씩 온돌방이 있으며, ‘麗澤堂(이택당)’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이택, 여택(麗澤)
麗, 고을 려(여)자이다. 한자사전에 보면 '이'라는 독음은 없다. 그래서 麗澤은 '여택'으로 읽어야 겠지만 '이택'이라고 읽는다. 굳이 구분하자면 여택으로 읽으면 고운 연못이란 뜻이고 이택으로 읽으면 이어져 짝을 이룬 두 개의 연못이란 뜻이다. 우저서원 앞에는 연못이 하나밖에 없으니 여택당이 맞을 수도 있겠지만, 두 연못이 이어져 있으면 서로 물을 대주어 어느 한 쪽만 마르는 일 없듯, 배움을 함께하는 붕우는 서로 절차탁마하여 상대에게 자극과 각성을 주어 함께 성정하고 발전한다'는 의미를 담은 이택당으로 읽는 것이 맞을 수 있다.
서원 앞에는 작은 연못이 있는데, 조헌이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해 고기를 기르던 곳이라고 전한다. 매정한 계모를 지극히 섬겨 감동으로 변화시켰다는 일화는 그의 인간됨을 보여준다. 서원 뒤쪽으로 조헌의 부모, 백부, 조부모의 묘가 있다.
사당 좌우에 각각 320년, 180년 정도 된 느티나무가 자리잡고 있다.
※ 행동하는 선비 중봉 조헌(趙憲, 1544~1592)
조헌의 본관은 배천(白川, 황해도 배천조씨)이고,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峯)·도원(陶原)·후율(後栗)이다.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과 이이(李珥), 성혼(成渾)의 문인으로 서인으로 분류된다. 1555년(명종 10) 12세 때 김황(金滉)에게 시서(詩書)를 배우고 1565년에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갔다. 1567년(명종2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관직에 나간다. 사헌부감찰, 통진현감, 전라도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선조 19년 보은현감으로서 노산군(단종)의 후사를 세우고 사육신의 을 정문(旌門)세울 것을 청하는 소를 올렸고 공주제독으로 있을 때 이이선생을 변호하고 정여립를 비난하는 소를 올렸다. 1591년(선조24)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보낸 게이테쓰 겐소가 명나라를 칠 것을 전달하자 그를 처형하자는 소를 올렸으나 이러한 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관직을 버리고 옥천에 은거하였다. 옥천에 후율정사(현 후율당-율곡의 정신을 잇는다는 )를 지어 뜻이 같은 사람들과 공부하고 토론하는 공간으로 삼기도 했다. 도끼를 들고가 상소를 올리는 지부상소( (持斧上疏)는 중봉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보은지방의 통로를 차단하는 공을 세웠으나 충청도 순찰사 윤선각 (尹先覺)의 시기를 받로 홍성지방으로 옮겨간다. 의병 1,700여 명을 모아 영규(靈圭)의 승군(僧軍)과 함께 청주성을 탈환하기도 하였다. 윤선각은 이후 각 고을에 공문을 보내 ‘관군이 마음대로 의병에 참가하면 처벌할 것이니 원대복귀하라’고 했다. 결국 중봉 막하의 관군은 흩어지고 700명 의사(義士)만이 남았다. 윤선각은 중봉이 거병하는 단계에서도 청양현감 임순을 옥에 가두어 관군의 의병진 참여를 막기도 했다. 현감이 지휘하는 관군이 의병진에 통째로 가담해 의병장의 지휘를 받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후 왜군에 맞서 금산에서 전투를 벌이다 전사하였다. 조헌의 묘는 옥천 표충사 뒤에 있다. 동생 조범이 형의 시신을 거두어 오늘날의 옥천 안남면에 장사 지냈다. 1604년(선조37)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으로 책록冊錄, 1734년(영조10) 영의정에 추증追贈되었으며, ‘문열文烈’의 시호를 받고 1883년(고종20) 문묘에 종사從祀되었다.
김포 출생의 중봉 조헌 선생은 임진왜란 때 의병궐기를 촉구하며 호서지방에서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킨 사상가이자 혁명가로, 아국 18현(我國十八賢·설총 등) 중의 한명이다. 중봉선생을 기리는 서원은 고향인 김포 감정동 우저서원 외에 충북 옥천의 표충사(表忠祠), 황해도 배천의 문회서원(文會書院), 충남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 충북 보은의 상현서원(象賢書院) 등이 있고, 1971년 금산에 있는 칠백의총이 성역화되었다. 금산 칠백의총에는 1603년 세운 ‘중봉 조선생 일군 순의비’(重峰 趙先生 一軍 殉義碑)가 있다. 일제가 ‘반시국적 고적’으로 지목해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한 것을 2009년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복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