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있는/문화유산

공숙공 정괄묘역/심달원신도비

구름관찰자 2024. 7. 16. 22:44
김포시 향토유적 15호 
소재지 : 김포시 대곶면 약암리 89-6
지정연도 : 2013년 12월 11일 
소유 : 동래정씨 충정공파 종중

 

심달원의 묘역이 위치한 약산마을에서 바로 북쪽의 율곡마을로 300m를 가면 좌측의 산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공숙공(恭潚公) 정괄(鄭佸 1435년 세종17~1495년 연산군1)은 자(字)가 경회(景會)이고, 본관이 동래(東萊)이며, 영의정 정창손(鄭昌孫)의 세째 아들이다.  조선 전기 성종(成宗)(1469~1494)대의 대표적 문신으로 1456년(세조2) 생원시 합격뒤 음보로 공조좌랑 정랑등을 지냈으나 1465년(세조11)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1473년 대사간이 된다. 관찰사, 병조판서, 형조판서 등 요직을 거쳐 마지막 해인 연산군1년에 우의정(조선왕조실록에는 우의정으로, 묘갈에는 좌의정으로 기록됨)으로 사은사가 되어 명에 갔다가 귀국하던 도중 칠가령에서 사망하였다. 정괄은 죽기 전에 아들 정종보에게 "평생에 적을 만한 공적이 없으니 비석을 세우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공숙공 묘역 옆 동산에는 양성이씨 묘역이 있고, 그 양성이씨 이긴의 묘역에서 우측 건너편 산자락에 청송심씨 심달원의 신도비각과 묘소가 보인다.

 

공숙공 묘역은 부인 정경부인 이씨(李氏)의 묘소와 함께 위치하고 있는 김포시 대곶면 약암리 약산은 정괄의 부인인 정경부인 양성이씨의 처가가 있는 곳으로 조선 전기 김포 지역에서 일어난 사대부 가문의 처가입향 (妻家入鄕)의 사례를 보여주는 문화유산이다.

 

묘역은 동향으로 배치되어 있고 정경부인 양성 이씨와의 쌍분이다. 조선 전기 사대부 가문의 묘제에 따라 충실하게 구성되어 있다. 계체석(階砌石)으로 상부의 계절(階節)과 하부의 배계절(拜階節)을 분리하고, 배계절을 다시 두 단으로 분리하여 상단에는 남쪽에 묘갈을 놓고, 하단에는 사각의 장명등과 복두공복형의 문인석 2쌍을 설치하였다. 조성 당시의 것으로 조선 전기의 제작 양식을 잘 보여준다. 묘역의 좌측에는 신도비(묘갈)가 세워져 있다. 정괄은 당상관 대감이었기 때문에 신도비를 세울 수도 있었겠지만 묘갈의 형태를 하고 있다. 대신 봉분과 석물의 규모가 커서 정승 묘의 위엄이 느껴진다. 정괄의 사후 2년 뒤인 1497년 세워진 이 묘갈은 조선 전기에 유행하였던 이수방부(螭首方趺)의 양식으로 머릿돌에는 운문에 싸인 용 한 마리가 여의주를 올려다보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전면이 남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총 높이는 95cm이다. 이수의 높이가 60cm이고, 비신은 너비 75cm, 두께 17cm이며 비좌는 너비가 125cm이다. 전체를 화강암으로 만들었고 표면이 마모되고 탈락이 심해 후면의 비문은 거의 판독 불가능한 상태이다. 

 

심달원 신도비, 심전 묘갈  (대곶면 약암리 산96)

 

승마산 동쪽 기슭에 해당하는 약산마을 뒷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으며, 심달원(沈達源-심연원의 동생)과 그의 아들로 경기도 관찰사를 지낸 3남 심전(沈銓), 그리고 그의 손자로 장수현감을 지낸 심우선(沈友善)(심전의 장남) 등 3대의 봉분이 조성되어 있다. 심달원(1494년 성종25~1535년 중종30)은 조선시대의 문신으로, 자는 자용이고, 본관은 청송이다. 영의정에 증직된 심순문의 차남이며 김안국의 문하에 있었다. (심순문은 갑자사화 때 연산군에 의해 참수되었다.) 1517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후 공직에 올랐으나 1519년 홍문관 부수찬으로 숙직하던 중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의 당이라하여 가장 먼저 투옥된 후 유배되었다. 1522년 봉상시 판관에 등용되었고, 중국어에 능통하여 1528년 명나라에 가는 성절사를 수행하였다. 외교문서(이문) 작성 및 교육에 기여하여 신임받았다. 호군, 판교를 거쳐 통례원 좌통례(정3품 당하관)에 이르렀고 사후 홍문관제학,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신도비 뒷면에는 정부인 파평윤씨 비문이 쓰여져 있다. 비각은 1578년(선조11년) 개수한 것이다. 인근에 있는 청심재가 재실이다. 

심달원의 묘소와 비각

비문에 의하면 1536년 약산 언덕에 장사지냈다고 하는데, 동향하고 있고, 봉분 앞으로 상석과 사각의 장명등이 서 있으며 좌우로 각 1쌍의 동자석과 망주석이 배열되어 있다. 비는 1563년(명종18)에 세워진 것으로 묘의 왼편에 북쪽을 보고 서 있으며, 이수방부와 비신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수와 방부는 화강암으로 만들었고, 비신은 대리석을 이용했는데 좌상에서 우하로 결이 있다. 최근 비각을 세웠는데 나무기둥에 한시기와를 얹은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비문은 부분적으로 마모가 심한 편인데, 1563년(명종18) 등을 역임한 이 글을 짓고, 셋째 아들 심전이 글과 편액을 썼다. 비의 총 높이는 273cm이고 비신의 높이는 160cm, 너비는 76cm, 두께는 18cm이다. 

심달원의 손자 심우선의 묘가 심달원 묘 바로 옆에 있다.
심전 묘소 및 묘갈. 심달원 묘에서 산 골짜기로 한참 더 들어가 있다
심달원 묘소 입구에 근래 세운 심전 신도비. 실록에는 심전이 사헌부로부터 탐욕을 이유로 탄핵받은 사례들이 기록되어 있다. 묘갈에는 질시에 의한 모함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의 3남 심우승이 임진왜란 중 공을 세우고 경기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좋은 평가를 받아 그의 아버지 심전도 사후 증영의정 청파부원군이 된 것이다. 심전의 서자 심우영은 허균의 처외삼촌으로서 홍길동의 모티브일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