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호공 심응사당
김포시 향토유적 4호 양호공 심응사당 소재지 : 김포시 운양동 314-2번지 지정일자 : 1986년 3월3일 소유 : 풍산심씨 종중 |
사당(祠堂)은 조선말기에 고쳐지은 목조 건물로서 축조 당시부터 지금까지 개축(改築)의 흔적이 없으나 기와와 단청의 상태가 양호하다. 좌향은 남동향이며, 정면2칸 측면2칸짜리 홑치마 맞배지붕 목조 기와집으로 박공에는 풍판을 달고 측면에는 반 칸 퇴를 두었다. 규모는 정면 3.9m, 측면 3.3m이다. 산을 등지고 경사진 곳에 석축하여 대지를 조성하고 건물을 세웠는데 둘레에는 기와를 얹은 담장을 둘렀다. 사당내부는 통칸이며 정면 벽에 영정을 액자에 넣어 걸어두었다. 상량문에는 1987년 8월 중건하였다고 적고 있는데 주위에서 발견되는 장대석들이 사당 중건 때 사용한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묘소와 신도비는 사당 동쪽 모담산(운양동 천현마을(한옥마을) 해발73m 뒷산) 북쪽 기슭에서 한강을 바라보고 있다. 신도시로 가꿔진 샘재공원 건너편에 공원의 일부로 존재하고 있다. (소재지 : 김포시 운양동 산9-16)
묘역은 한 단 장대석으로 2단 구획하였다. 봉분은 짧은 장대석으로 된 호석을 둘렀으며, 봉분 앞에 상석, 향로석, 망주석2기 , 문인석 2기, 장명등 1기로 이루어져 있다. 주위에는 원래 곡담이 있었던 흔적이 보이며, 곡담에 얹었던 기와편이 곡담 흔적을 따라 흩어져 있다. 봉분 높이는 160cm에 직경 350cm이고 아래쪽으로는 대리석재의 얕은 병풍석을 둘러 조선 전기의 무덤양식을 보여준다. 향로석은 화강암 재질이고 상면 정방형을 하고 있다. 망주석과 문인석은 좌 우 한쌍이 서 있는데 돌이끼가 많이 낀 상태이고 사각형 장명등은 최근에 다시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심응은 무신으로서는 최고직인 정3품 절충장군에 올랐지만 무인석이 아닌 문인석이 자리잡고 있다. 15세기 전반부터 16세기 중반까지는 권문세가들의 묘에 비교적 활발하게 무인석을 조성했지만 16세기 중반이후 사림이 중앙 정계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면서 수량이 서서히 감소하더니 거의 소멸하다시피 하였다. 따라서 문관 출신은 문인석을, 무관 출신은 무인석을 설치하지는 않았다. 대표적 문관인 영의정 황희黃喜(1363~1452) 묘에 무인석이 서 있고, 대표적 무관인 충무공 이순신李舜臣(1545~1598) 묘에는 문인석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문무관의 출신 성분을 떠나 대부분 문인석만 세운 것이 보통이다.
신도비는 공의 사망후 20여년이 지난 1524년(중종19)에 제작되었다. 비석은 대리석재로서 비 머리가 둥근 비갓을 갖추었다. 비문은 모두 67자 29행이다. 비문의 기록에 의하면 이수와 귀부를 갖춘 것으로 되어 있는데 비 위로 토사가 쌓였기 때문인지 제자리에서 옮겨진 때문인지 현재 귀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대좌로 보이는 부분은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백색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비의 표면은 돌이끼와 넝쿨 식물의 뿌리가 자리잡고 여러 곳에 금이 생기는 등 훼손이 심하게 이루어지고 있어 시급한 보존대책이 요망된다. 이수의 앞면에는 용2마리, 뒷면에는 용1마리를 구름무늬와 함께 선명하게 양각되어 있고, 비신의 전면에는 비문이 새겨져 있는데균열과 마모가 심해 글씨를 판독할 수 없는 곳이 많다. 비문은 당시 영의정 남곤(南袞)(그의 아들 심정과 함께 곤정으로 불리는)이 글을 짓고 당대 최고의 명필 김희수 (金希壽)가 썼다. 현재 확인되는 비의 총 높이는 224cm이고 비신은 너비 95cm, 높이 162cm, 두께 25cm이다.
※ 양호공 심응 (沈膺 세종 15년(1433)~연산군 10년(1504))
조선 전기의 무신인 양호공(襄胡公) 심응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하는 사당, 사우(祠宇)이다. 본관은 풍산(山), 증조는 현령 심승경(沈承慶), 조부는 의흥삼군부사 양정공(襄靖公) 심구령(沈龜齡), 아버지는 남원도호부사(종3품) 심치(沈寘), 어머니는 용구현령 박화(朴華)의 따님, 배위는 광흥창부승 서문한(徐文翰)의 따님 대구서씨, 아들이 중종반정공신 좌의정 심정(沈貞)(기묘사화,소요정, 지낭), 증손이 우의정 심수경(沈守慶)(청백리,8도관찰사)이다.
세조 6년(1460) 무과에 장원 급제하여 왕실(王室)금위(禁衛)로 발탁되었으며 세조 11년(1465) 내금위(內禁衛) 무예장에서 활로 철전(鐵箭:쇠로 만든 화살)을 300보 지점 밖에서 적중시켜 금위군에서 제일로 꼽혔다.
세조 13년(1467) 길주 호족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절도사(節度使) 허종(許琮)의 휘하에 배속되어 난을 평정하는 큰 공을 세워 적개공신(敵愾功臣)(2등공신)으로 책록되고 절충장군에 승서되었다. 성종2년에 풍산군(豊山府院君-사후 아들 심정에 의해 부원군에 진봉됨 )에 봉해졌다. 성종 22년(1491) 북쪽의 호병(胡兵)이 출몰하여 변장(邊將)을 살해하고 소요할 때 야인들을 정벌하라는 왕의 교서를 받고 심원, 심정 두 아들을 대동하고 출정하여 적의 소굴을 소탕하는 공을 세웠다. 연산군 7년(1501)에 가선대부 기숙으로 봉조하를 제수, 곧 벼슬에서 은퇴했다. 연산군 10년(1504) 졸(卒)하여 부음이 조정에 계달되자 왕이 유사(有司)를 보내 조문하고 예장케 하였으며, 양호(襄胡)라는 시호(諡號)와 함께 왕이 쓴 철권단서(鐵券丹書:목판에 철권이라 쓴 공훈록)와 초상화를 내렸다. 후일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성종 때 심응(沈膺)은 김포현(金浦縣)의 경재소를 맡으며 향리를 학대하였으며, 거둬들인 속전(贖錢)을 모두 가져다 썼다. 더욱이 군현에 속전을 요구하기도 하였는데, 바친 것이 성에 차지 않으면 수령을 꾸짖기도 하였다. 당시 중앙의 관인 사회에서 주도적 지위를 차지한 훈신(勳臣) · 척신(戚臣) 계열은 연고지의 경재소를 관장하면서 그들의 사적 경제기반을 확대하였다. 또한, 지방 관리와의 개별적 연결을 통해 유향소를 장악함에 따라 사림들은 그에 맞서 저항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결과 사화로 비화하게 된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임진왜란 후 수령권의 강화로 유향소의 지위가 격하되면서 이를 통할하던 경재소도 1603년(선조 36) 영구히 폐지되었다.